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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사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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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11호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저수지로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약 2.6㎞에 이르는 제방이 현존하고 있으며 고대 농업사와 토목건축적 의의가 인정되어 1963년 1월 21일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벽골제에 대한 연혁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의 기록(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처음 벽골지를 여니 제방의 길이가 일천팔백보이다)으로 소급된다. 그러나 흘해왕 21년, 즉 서기 330년은 이 지역이 백제 영토로 추정되므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신라본기에 삽입되었다고 보면 축조시기는 백제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벽골제는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15년(1415)에 중수하였으나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이 설립되고 벽골제를 운암제 설치에 따른 김제간선수로로 개조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쉽게도 지금은 과거의 위명을 드러낼 제내(저수지)와 제외(관개수전)를 상실하고 제방조차 종단되어 그 위용을 헤아릴 길 없으나, 1415년(조선 태종15년) 벽골제 중수시 세워진 중수비(벽골제 제방과 함께 사적 제111호)의 전문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김제군조에 기록되어 있어 중수 이전부터 전해왔던 벽골제에 대한 고대의 인식과 공사규모 등을 통해 벽골제에 대한 일단(一端)을 헤아릴 수 있다. 벽골제 중수비는 당초 신털미산 정상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사적 벽골제를 선양하기 위해 단지가 조성되면서 현 벽골제단지내로 이전하였다. 재질이 점판암인 까닭에 세월에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우나 앞서 밝힌 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 전문을 헤아릴 수 있다.

중수비(重修碑)에,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結) 95 복(卜)이라 하니, 고적(古籍)에 적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의 근원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하늘이 우리의 국조를 열어 성군이 태어나니, 힘써 다스려서 태평 세월을 성취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명하여 사방을 순시하고, 제방(堤防)을 완비하며 관개(灌漑)를 잘 통하게 하였다. 을미년 봄에 판상주(判尙州) 이발(李發) 공(公)을 명하여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으니, 이공이 처음으로 벽골(碧骨)에 와서 이것을 보수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번거롭고 바빠서 시작하지 못하였다.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함양(咸陽) 박습(朴習) 공과 경력(經歷) 권전(權專) 군(君)과, 경차관(敬差官) 희중(凞中)이 모두 여기에 와서 공사의 어렵고 쉬운 것을 고찰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니, 드디어 임금이 허가를 하였다. 각 군의 장정 총 1만 명과 일을 처리하는 사람 3백 명을 증발하고, 옥구진 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 군(君)과 지김제군사(知金提郡事) 김방(金倣) 군을 시켜 감독하게 하니, 이해 9월 갑인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0월 정축일에 완성하였다.

둑의 북쪽에는 대극포(大極浦)가 있는데, 조수가 몹시 격하며, 남쪽에는 양지교(楊枝橋)가 있는데, 물이 깊게 고여 있어서 공사하기가 무척 힘이 들어, 옛 부터 어려운 공사였다. 이제 먼저 대극포의 조수가 치는 곳에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를 양지교(楊枝橋)의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 세워서 기둥을 만들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木柵)을 막아서 흙을 메우고, 또 제방 무너진 곳에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며, 제방의 내외로는 버들을 두 줄로 심어서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하였으니,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룡(丘壟)처럼 바라보였다. “ 하였다.

평지에 구축된 거대산업구조물인 벽골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경사회에서 치수(治水)의 기능을 헤아려야한다. 전통농경사회에서 치수는 식량생산에 절대적 요소로 생존의 문제이자 국가존속의 문제였다. 대규모 수리시설은 국가기간시설이었으며, 왕의 권능은 치수자로서의 기능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벽골제는 제방을 쌓는데만 연인원 32만여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되며 이밖에 수문 및 하천 공사 등을 헤아릴 때 공사인원은 훨씬 증가한다. 당시 사회규모와 인구수 등을 고려하여 생각한다면 벽골제의 축조 유지 수축공사가 얼마나 거대한 국가단위 사업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담당부서 :
벽골제아리랑사업소 
연락처 :
☎ 0635404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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